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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고려 의종 - 대령후 왕경

고려 인종에게는 4명의 왕비가 있었다.
이자겸의 딸이자 인종의 이모인 2명의 폐비가 있고 두명의 왕비가 있었는데 그 중 공예왕후 임씨에게서 5남4녀를 얻었다.
공예왕후가 가장 아끼던 자식이 바로 대령후 왕경이다.
인종과 공예왕후사이에서 출생한 둘째아들.
공예왕후는 내심 그를 왕태자로 삼고 싶었다.
그러나 인종의 마음은 그의 형 의종에게 가 있었다.
이로인해 의종에게 본의아니게 미운털이 박혀 결국 역모로 몰려 귀양살이를 하다가 유배지에서 생을 마감한다.

정함은 대관들과 대립하고 있었는데 대관들을 척결하는 방책을 모색하던 중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의종 즉위 직후 대령후로 책봉된 왕경이었다.
먹이감을 발견한 정함은 산원 정개수를 포섭해 거짓으로 역모를 고변하도록 했다.
정개수는 대성과 이빈등이 왕을 원망하여 경을 추대해서 왕으로 삼으려 꾀한다고 무고했다.
이 말을 믿은 왕은 역모자를 처벌하고 왕경을 귀양 보내려 했다.
그러자 간관 김존중이 간언하여 중지시키고 관리를 시켜 심문하기를 청하니 과연 증거가 없었다.
정수개는 얼굴에 문신을 새겨 흑산도로 귀양보내고 이빈은 운제현으로 귀양보냈다.

정함이 자신이 죄가 탈로 날까 두려워 또 참소하기를 "외척과 조정의 신하들이 대령후의 집에 출입한다는 것이 진실로 거짓말이 아닙니다"하였다.
즉, 외척과 조정신하들이 대령후의 집에 출입하고 있으니 자신의 말은 무고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이었다.
이 참소에 김존중이 가세하여 공예왕후의 여동생의 남편 내시낭중 정서와 어머니의 아우 승선 임극정과 사이가 좋지 않은 것을 이용해 김존중과 정함이 유언비어를 꾸며서 아뢰니 왕이 의아하게 생각했지만 왕은 왕경이 역모의 중심에 있다고 의심하게 되었다.
재상 최유청, 문공원, 유필 등이 간관 최자영, 왕식, 김연부, 박소등을 인솔하고 합문앞에 엎드려 벌 줄것을 청원하였다.
정서가 대령후와 친교를 맺고 자기집에서 잔치베풀었다는 이유였다.
어사대에서도 정서가 종실과 결탁해 자주 술을 마신다고 보고하였다.
의종은 왕경의 종 김감을 회안으로 악공 최예등을 매를 때려 각각 유배보냈다.
또한 의종은 귀양갔던 이빈을 소환하는 동시에 정서는 장형을 가해 동래로 귀양보내고 함께 어울렸던 양벽, 김의련, 김감을 각각 귀양보냈다.
최유청은 왕경에게 그릇을 빌려주어 대신의 체모를 잃게했다는 이유로 남경유수로 강직하였으며 잡단 이작승은 집에 있으면서 탄핵에 참여치 않았다는 죄목으로 남해현령으로 강직되었다.
이들 두사람은 모두 정서의 매부들이다.

왕에게 있어 왕경은 눈에 가시였다.
최예가 사면을 받아 개경에 있었는데 부인하고 사이가 좋치못했다.
최예의 부인은 "최예는 여전히 죄를 뉘우치지 않고 대령후의 집을 왕래한다"고 무고하였다.
왕이 최유칭에게 명하여 국문하였으나 증거가 없었다.
평소 도참설을 믿고 동생들과 화목하지 못했던 의종은 의심을 풀지 못했고 대령후와 임극정의 죄상을 탄핵하게 하였다.
그러나 태후가 구제할까 두려워 전전긍긍했다.
이에 태후를 보제사로 보낸 뒤 어쩔수 없이 윤허한 양 꾸몄다.
이로써 아우 대령후는 천안부로 최유청은 충주목사로 임극정은 양주방어사로 정서의 매부 우부승선 김이영은 승평군사로 이작승은 남해현령으로 귀양 또는 강직하였다.
정서는 동래에서 거제현으로 유배지를 옮겼다.

그러던 어느날 의종을 죽이려는 화살 하나가 날아드는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의종은 범인의 윤곽이 들어나지 않자 대신들을 닦달하며 문책조서를 내린다.
대신들은 의종의 문책에 쩔쩔매며 어쩔수 없이 대령후 왕경의 종 나언, 유성, 황익 등을 지목한다.
그날부터 참혹한 고문이 자행되었고 거짓 자백을 받아내어 그들을 참형에 처하였다.
왕경은 그리던 개경땅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귀양살이를 하다가 어느 유배지에서 한많은 생을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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