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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고려 25대 충렬왕

연에 오른 충렬왕은 죽음을 예감하고 있었다.

아들이 자객의 손에 죽을까봐 귀국길도 두려웠다.

다행이 후궁 숙창원비 김씨의 집에서 머물 수 있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이제 숙창원을 떠나 신효사로 가는 길이었다.

돌아보면 파란만장했던 세월

몽골황실의 아내 제국공주

물론 고려의 아내 정화공주가 있어 사실 원나라와의 정략결혼인 제국공주를 좋아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미운정도 정이라고 그녀가 서른아홉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등졌을 때 충렬왕은 왠지 모를 슬픔이 밀려왔다.

원나라 대도에 있던 세자는 생모의 소식을 듣고 한 걸음에 개경에 도착했다.

그리고 부왕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의 죽음은 무비 때문이라며 무비를 비롯해 부왕의 측근들을 살해하고 숙청했다.

충렬왕은 쿠빌라이 입장에서 보면 사위이지만 그나마도 딸의 원인모를 죽음으로 그 관계가 소원해진 반면 세자는 쿠빌라이의 외손자 아닌가?

이러한 관계를 이용해 쿠빌라이는 고려를 견제하고 있었다.

고려의 조정은 두 왕의지지 세력으로 나뉘어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

이런 와중에 충선왕이 고려의 자주를 외치며 과격한 정책을 전개하면서 부왕의 측근세력을 대대적으로 숙청하자 원나라 조정은 충선왕을 폐위시키고 충렬왕을 복위시켰다.

 

72세의 충렬왕은 쓴웃음을 지었다.

아들과의 권력다툼이라니....

충렬왕을 지지하는 세력들은 충선왕과 그의 아내 계국대장 공주와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계국대장 공주는 원나라 세조의 손녀이다.

계국대장 공주를 개가 시킬 수 있다면 충선왕을 궁지로 몰 수 있었다.

당시 충선왕은 통역관 출신으로 수상에 오른 조인규의 딸 조비를 총애하였다.

이를 안 계국대장 공주는 여자로서 치욕감을 느꼈다.

계국대장 공주는 친정에 편지를 써 왕이 자기를 멀리하는 것은 조비의 저주 때문이라고 고자질 해버렸다.

조비와 그의 가족들은 감옥에 갇혀 갖은 고문을 받았다.

견디다 못한 조비의 어머니는 거짓자백을 하게 되었고 이 틈을 충렬왕의 측근들이 비집고 들어갔다.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한 계국대장 공주는 궁 안의 천안 일꾼들과 어울렸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충렬왕 측근들은 고려의 왕족 중에 잘생긴 서흥후를 골라 계국공주와 연결하였고 작전대로 서흥후와 계국대장 공주는 서로의 몸을 탐닉하는 사이가 되었다.

계국대장 공주는 자신을 멀리하는 남편과 이혼도 불사하려 하였다.

그러나 원나라 성종이 죽고 충선왕이 지지하던 무종이 원나라 황제가 되어 이번 개가작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충렬왕은 외롭고 쓸쓸했다.

할아버지 고종 때 몽고는 징기스 칸을 중심으로 통일을 하였다.

몽고의 통일로 거란은 설자리를 잃고 고려를 침입하였는데 고려와 몽고는 연합하여 거란을 토벌하였다.

이로 인해 고려와 몽고의 외교관계는 성립하였으나 몽고의 무리한 공물요구는 두 나라간의 거리를 멀게 하였다.

마침내 몽고는 몽고 사신 저고여 사건을 구실삼아 고려를 공격하였고 이에 맞서 당시 무신정권의 집권자 최우는 강화도 천도를 강행하였다.

그러나 오랜 전쟁으로 국토는 황폐해 졌으며 수많은 백성들이 살해되거나 고통 받아야 했다.

이에 무신정권은 백성들을 섬이나 산성으로 피신하도록 조치하자 몽고군은 평야의 곡식을 모조리 불태웠다.

곡식이 부족해진 백성들의 고통은 극에 달했다.

오랜 전쟁과 백성의 고통을 지켜볼 수만은 없었던 고종은 태자(훗날 원종)를 몽골로 보내 화해를 시도했다.

당시 몽골제국도 내부적으로 대칸의 자리를 놓고 칭기스 칸의 손자인 쿠빌라이와 아릭부케 형제가 다투고 있었다.

고려 태자는 영민하고 상황파악이 남다랐다.

그는 쿠빌라이 편에 서서 도왔고 쿠빌라이로 부터 고려의 독립국 지위보장을 약속받았다.

그의 예상대로 쿠빌라이가 대칸에 올라 원 제국을 세웠다.

원 제국을 등에 업은 원종은 강화도에 있는 무인정권에게 환도 명령을 하였고 무인정권은 거부하며 저항을 하였다.

특히 무인정권의 붕괴는 삼별초에게는 조직 생존의 문제였다.

삼별초는 끝까지 진도와 제주로 본거지를 옮겨가며 항거하였지만 마침내 고려와 원의 연합군에게 토벌 당했다.

이로써 100년을 유지하던 무인정권은 붕괴되었다.

노인의 입가에 미소가 흘렀다.

충렬왕은 부왕의 명에 의해 원나라의 수도 대도에 볼모로 있었다.

왕권강화를 위해 원나라 공주와 결혼도 하였다.

충렬왕은 낯설고 물설은 타국에서 젊은 날을 보내고 고려로 귀국하던 날 변발과 호복차림으로 귀국하였다.

그 때는 왠지 그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백성들의 환호 속에서 눈물을 훔치는 백성들을 보면서 적잖은 충격을 받았지만 겉으로는 태연한 척 했다.

어짜피 원의 속국이 아니던가 복장이 어떻든 그것은 문제가 되질 않았다.

2번에 걸친 일본원정은 전쟁으로 피폐해져 물자의 조달의 어려움과 인적자원의 충원이 가장 어려웠다.

그렇게 어렵게 여몽연합군을 구성하였지만 태풍을 만나 결국 2번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그리고 부마국으로써 수많은 공녀 징발의 시련을 겪어야만 했다.

왕은 이러한 일련의 일들이 모두 짜증이 났다.

그는 원나라에 있을 때 즐겼던 사냥을 즐겨했다.

매 사냥을 할 때는 그나마 지금의 상황을 잊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로 인한 엄청난 비용은 모두 백성들의 몫이었다.

사냥의 장소는 풍덕 마제산이나 장단의 도리산 때로는 충청도까지 사냥을 떠났다.

특히 장단의 도리산으로 사냥을 떠날 때는 무비라는 궁인을 데리고 가서 즐겼다.

 

부창부수라고 했던가.

제국공주 또한 충렬왕의 첫 부인인 정화궁주를 자기 앞에 무릎 꿇게 만드는 행동을 거침없이 하였고 왕의 총애를 받지 못하자 전국의 인삼이나 잣 등을 매점매석해서 원나라 상인에게 팔아 거액의 돈을 챙기기도 하였다.

왕은 조용히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기는지 죽음을 맞이하는지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처음으로 고려왕으로서 원의 부마가 된 왕

두 번씩이나 왕위에 오른 왕

힘겹고 어두운 시기에 태어나 고려의 희생양이 된 충렬왕은 파란만장한 삶을 이렇게 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