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의종-김부식 송나라의 문장가 집안 소순의 아들들 이름이 소식과 소철 이다. 우리가 잘아는 송나라 최고의 문장가 소식이 바로 소동파이다. 김부식의 동생이 김부철이니 절묘하게 대입된다. 김부식의 집안은 신라말 고려 태조에게 귀의해 경주지방의 행정을 담당하는 주장에 임명되어 경주에서 살았다. 그의 아버지 때 정계에 진출했지만 일찍 세상을 떴다. 아마도 최고의 문장가로 키우고 싶은 아버지의 바람이 이름에 녹아 있는 듯 하다. 김부식은 고려중기 때 인물이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할 시기 호족들 중심에서 이제는 나라의 기틀이 마련되어 안정된 국가로 접어든 시기이다. 이자겸의난과 묘청의 난을 통해 흔들리던 정계가 안정을 찾아갔다. 개혁과 변화보다는 체제안정에 힘이 실리는 이유다. 한문은 지금의 영어처럼 우물안 개구리에서.. 더보기
의종-윤언이 윤언이는 문하시중 윤관의 아들이다. 문장을 잘하였고 특히 주역에 정통하였다고 한다. 그는 김부식과 사이가 안좋았던것 같다. 물론 묘청의 난 때 김부식의 막료로 출전하여 많은 공을 세웠다. 그러나 정지상과 내통하였다고 김부식이 상부에 보고를 하여 양주방어사로 좌천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이유가 무엇일까? 왜 윤언이는 김부식을 도와 출전한 전쟁에서 공을 세웠는데도 좌천되는 수모를 겪었을까? 그 이유는 그의 아버지 윤관의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예종 때 아버지 윤관이 왕명으로 대각국사 의천의 비문을 지은일이 있었다. 그런데 문도들이 보기에 글이 신통치 않았는지 왕에게 고하여 글을 다시 짓게 하였다. 그 때 김부식에게 글을 짓게 하였는데 김부식은 사양하지 않고 글을 다시 지었다. 이 때문에 윤언이는 원한을.. 더보기
의종-1,2년 의종은 성질이 놀이와 잔치를 좋아하였고 여러 소인들과 친압하여 마침내 화란을 당하였다고 한다. 원년의 내용을 보면 격구를 굉장히 좋아하였음을 볼 수 있다. 대간이 소를 올려 간한 일에 왕이 답을 하지 않자 대간이 집으로 돌아갔다. 왕이 다시는 격구를 하지않겠다는 뜻으로 구장(격구경기를 할 때에 쓰던 공채)을 어사대에 내렸다. 어사대는 왕의 조서를 받들어 수창궁 북문을 잠그고 군소배들의 출입을 금하였다. 왕이 북원에 나와서 놀때 좌우 사람에게 이르기를 "나의 공을 치는 기술을 다시 시험하지 못하리라"하고 공을 치니 이에 따를 자가 없었다. 의종은 격구를 좋아한 것 뿐아니라 잘하기도 한 모양이다. 또한 11월에는 서경사람 이숙·류혁·숭황 등이 사형된 일도 있었다. 역모죄 였다. 예전에 금나라의 제전사가 돌아.. 더보기